22-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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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형대수학
밧세바는 다윗과 함께 지냈다.
다윗의 행적을 많은 백성들이 알았을 것이다,
왕궁에 있던 사람들은 물론일테다.
수치스러운 일의 결과를 안고 가는 다윗.
그리고 밧세바
그리고 솔로몬
다윗의 솔로몬을 향한 유언은 상당히 시적이다.
내가 이제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간다.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어라.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게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면 --> 무엇을 하든지 형통한다.
이 명제는 참일까?
형통한다는 말은 어떤 의미인가.
다윗의 유언은 진심 이었을 테다.
많은 사건을 겪고, 많은 삶을 살아왔고, 많은 일을 했던,
한 나라의 가장 칭송받는 왕 다윗.
그의 삶의 마지막에 그가 던진
농축된 한 마디는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면, 무엇을 하든지 형통한다이다.
선형대수학 과목을 듣기전 교수님깨서 devotional 한 구절 읽어주셨다.
'그리스도 인들에게 어떠한 혼돈도 최후상태가 아니다.'
이 구절은 내게 큰 위로가 되었다.
그 최후상태에 우리게 승리로 약속하신 하나님.
아직은 너무 멀게만 느껴져서, 와닿지 않는다.
그래도 이 혼돈이 최후상태가 아님을 인식하고, 혼돈 속이지만 한 발짝 내딛어 본다.
이를 토대로 봤을 때 우리의 형통함도 최후 상태가 아니다.
형통함에 현혹되지 않는 것이 중요할테다.
우리의 목적이 형통함이 되는 함정에 빠지면,
나의 하나님은 형통함이 될 터이니, 혹이 나의 하나님은 형통함을 서빙하는 분이 될 터이니,
어떤 일을 하도록 설득 할 때 그 행위에 따른 보상이나, 징벌을 이야기 하는 것은 효과적이나, 위험이 불가피 하게 따르는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행한다. 이 구절에 맹목되어 따른다면, 이 또한 실수이다. 예수께로부터 지적받는 바리새인이 되는 격이다.
매번 나누는 말씀이지만,
우리의 목적 자체가 하나님 그 자체 이어야한다.
하나님 그 분 만으로 만족하고, 기뻐하는 삶.
난 지금 그렇게 살고있나.?
아닌 것 같다.
언제 그랬던 적이 있었나.
누구나 그랬듯 수련회 때, 강물 예배 때, 찬양과 기도 속에 몰입되어 있을 때.
전적으로 하나님에 대해 집중 할 때.
그 때 한 없이 기쁘고 평안하고 만족 했었다.
그런데 그게 항상 그 때 뿐이다.
삶에서 그 마음과 은혜로 살아가지 못한다.
살아가지 않는다.
내 능력의 일인가?
아니다.
그럼 내가 취해야 할 자세는?
정말 그렇게 살도록 방향성을 둬보자.
기도하자. 구해보자.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났을 때, 하신 말씀을 기억하자.
마르지 않는 생명수로 채우기를 기도하자.
열왕기상 3장 6절을 읽으면서 위에 했던 말들이 좀 정리 됐다.
1. 정말로 다윗이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 봤을 때,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 행하였더니 형통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저 유언을 남긴 것이다.
2. 다윗이 1번의 참 거짓 여부와는 상관 없이 1번이 옳기 때문에 솔로몬이 1번 처럼 살도록, 가이드 라인을 제시한 것이다.
사실 1번 과 2번을 적절히 혼합해서 이해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실제로 다윗은 삶 속에서 하나님의 명령과 주권하심에 형통함을 경험했고, 솔로몬도 이렇게 살기를 바랐기 때문에 조언한 것이다. 라고 말이다.
이 부분에 대해 내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님을 믿어서 좋은 것은 미래의 '나'지 , 현재의 '나'가 아닌 경우가 훨씬 많기 때문에
내가 형통하게 살고 있구나 라는 것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라고 오해 하는 것 같다.
내 욕심 때문인 것 같다 아무래도.
하나님께 기도 해서 받은 기쁨은 항상 그 한순간으로 치부하고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수많은 문제들에 집중하고, 그 문제들을 해결 하려고 집중하고 애쓰다 보니
감사한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
다시 돌아와서 열왕기상 3장 6절에 솔로몬이 다윗의 삶을 평가 할때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그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그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주사 오늘과 같이 그 의 자리에 앉을 아들을 그에게 주셨나이다.' 라고 평가 한다.
삶의 굴곡 속에서 저점에만 집중하는 나와, 그로부터 나와 숲을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솔로몬과 다윗의 태도와 차이가 보이는 것 같다.
요즘 내 시야가 많이 가리워 있는 것을 느낀다.
눈 앞에 닥친 문제와 과제들을 치우는 데 급급하다.
까만 배경에 흐릿한 나무만 짚고 길을 걸어가고 있다.
길의 목적지는 방학이라는 작은 쉼터이다.
겨우, 쉼터 이다.
그 쉼터에서 조차 또 앞으로 나아가면 다시 그 숲이다.
기쁨과 활력이 어디에 있나.
사람들과 관계하며 사랑을 나눌 때 비로소 샘 솟는다.
주님께 하는 진실된 기도 속에서 비로소 샘 솟는다.
솔로몬이 주님께 구하는 것은 올바른 공동체를 세우기 위한 지혜 였다.
올바른 공동체에 대한 그의 진심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솔로몬은 정말 잘 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본인의 능력의 한계를 깨달았다.
그래서 그것을 구한다.
돈과 장수와 복수가 마음 속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올바른 공동체를 만들어 나갈까 고민했던 솔로몬.
칭송받는 위인과 리더를 보면, 결국 그들이 칭송 받는 이유는
돈을 많이 벌어서가 아니라 , 오래 살아서가 아니라, 복수를 잘해서가 아니라
그 마음이 어디에 있었느냐에 따라 칭송 받는 다고 생각 한다.
이순신은 나라를 지키고 싶은 마음이 진심이었고,
세종대왕은 백성의 문맹률을 향한 마음이 진심이었다.
돈과 장수와 복수와 욕심에 눈이 멀면,
절대 그 리더는 그 인물은 좋은 사람으로 평가 되지 못한다.
나는 하나님에 대해 진심인가?
나는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려는가?
하나님 한 분만을 원한다는 기도는 헛바람만 든 소리가 아닌가? 공허한 소리가 아닌가?
하나님께서 내게 이것저것 들어주시길 원한다고 생각하기 전에 내 마음을 점검해야 겠다.